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민청학련) 사건

1974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중심으로 관련자 180여명이 불온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시키고 공산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혐의로 구속-기소된 사건이다.

사건설명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은 1974년 발생한 시국사건으로 관련자 180여명이 불온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시키고 공산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당시 중앙정보부(中情‧중정)이 밝힌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와 투쟁목표, 활동사항은 다음과 같다.

■ 배후

민청학련의 배후에는 과거 공산계 불순단체인 인민혁명당(인혁당) 조직,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의 조종을 받은 일본 공산당원, 국내 좌파 혁신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배후 인물인 도예종(都禮鍾), 서도원(徐道源), 하재완(河在浣) 등은 과거 공산주의 지하 활동을 하다 검거됐던 경력이 있다. 이들은 1971년 4월부터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여정남(呂正男, 경북대 법대생)을 포섭, 경북대 교련반대 데모와 불온 유인물 살포 사건, 경북대 反독재 민주구국투쟁위 학생데모 등을 조종했다. 이와 함께 1966년 일본 좌익계 인사인 다치카와 마사키(太刀川正樹)는 한국을 수차례 왕래하며 공산당원 출신의 하야카와 요시하루(早川嘉春)와 함께 사건 주동자인 이철(李哲), 유인태(柳寅泰) 등과 접촉, 폭력혁명 계획을 선동했다. 황인성(黃寅成)은 이철(李哲) 등에게 전국 대학생 연합조직방법과 투쟁방법, 목표를 교사(敎唆)하고 자금을 제공하는 한편 데모 때 사용할 유인물의 원고를 제공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기독학생총연맹’ 간부들은 민청학련이 주도하는 反정부 데모가 실패할 경우 2단계 데모를 획책했다.

※도예종은 前 인민혁명당(인혁당) 당수로 1964년 7월 북한간첩 김배영, 김규칠 등으로 구성된 인민혁명당을 조직, 지하활동을 하다가 검찰의 수사를 받고 실형을 한 인물이다.
※ 서도원은 용공단체인 前 민주민족청년동맹 위원장으로 활동하다 1961년 12월에 검찰의 수사를 받고 실형을 한 인물이다.
※하재완은 용공(容共)단체인 민족자주통일경북협의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다 5‧16 이후 도피, 1964년 사면됐다.
※다치카와 마사키(太刀川正樹)는 당시 일본 잡지 <주간현대> 자유기고가이자 조총련 비밀조직원으로 재일민단원(在日民團員)을 자칭했던 곽동의[郭東儀, 現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 의장]의 조종아래 관광명목으로 남한을 수차례 드나들었다. 그는 공산당원 출신의 하야카와 요시하루(早川嘉春)와 함께 민청학련 주동자인 이철, 유인태 등과 비밀리에 접촉했다.

■ 사건 주동자의 사상적 배경

민청학련의 행동총책인 이철(李哲)을 비롯한 정문화(鄭汶和), 유인태(柳寅泰), 김병곤(金秉坤), 황인성(黃寅成), 이근성(李根成), 나병식(羅炳湜), 정윤광(鄭允洸), 서중석(徐仲錫), 안양로(安亮老) 등의 주동자들은 정치사회 사상연구를 빙자해 각종 공산주의 서적을 탐독했다. 이들은 앞서 언급한 민청학련 배후 인물들로부터 공산주의 교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대남(對南)방송을 꾸준히 청취해, 마르크스-레닌 사상에 물들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염원하는 이상적인 사회 건설을 위해 자유민주주의 정치제제를 정면 부정하는 노농(勞農, 노동자-농민) 정권을 수립하는 길밖에 없다고 결론짓고, 본격적인 폭력혁명에 의한 대한민국 정부의 타도를 기도했다.

■ 투쟁목표 및 전략

이들은 폭력 봉기를 선동함에 있어 처음부터 공산주의 색채를 드러내면 학생, 시민의 호응을 얻을 수 없음을 감안, 제1단계로 각종 학원 서클을 통해 유신체제와 정부시책을 비(非)민주, 독재로 단정, 민주회복, 민생고 해결 등의 명분을 내세워 反정부세력 규합을 획책했다.

2단계로 이 같은 슬로건을 앞세워 4월3일을 기해 학생-시민을 선동, 일제히 봉기-유혈사태를 유발해 시위 군중을 폭도화시켜 정부를 타도하려했다. 3단계로 반제(反帝), 반식민지, 반매판(反買辦)을 표방, 노동자-농민계급과 통일전선이 형성된 여타 계급과의 이른바 민주연합정부를 수립하고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부수립을 목적으로 했다.

■ 모의(謀議)활동사항

10‧2학원사태(10‧2서울대문리대시위)를 주도한 이철(李哲)은 방학으로 데모가 단절되자 전국적인 학생조직이 없었던 것과 공산혁명의 기초 동력인 노동자, 농민의 호응을 얻지 못한 데 있다고 판단, 1973년 12월 초순부터 새로운 학생조직 결성에 나서 조직을 지방으로 확대하고 전국화할 것을 기도했다. 이들은 1974년 3월에 이르러 폭력혁명의 계획이 구체화하여 거사가 임박하자 민청학련을 구성하게 됐다. 거사일이 가까워지자 주모자들은 학생과 시민을 선동하기 위한 전단, 선언문 등 유인물을 다량 제작하여 전국적으로 살포하려 했다.

특히 회합-전선-연락 등에 있어 특수훈련을 받은 간첩들이 사용하는 수법을 썼다. 이들은 2개의 가명을 사용하며 타인의 주민등록증을 갖고 신분을 위장하기도 했다. 중정은 민청학련 사건의 전모를 밝히면서 “많은 선량한 학생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순공산세력의 책동에 이용당해온 사실을 발견했다”면서 “정부는 옥석을 가려 이들의 장래를 위해 관용을 베풀 것이나 공산계열에 따른 학원침투 불순세력을 단호히 뿌리 뽑겠다”고 밝혔다.

■ 노무현 정권 ‘민청학련’ 관련 주요 인사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민보상위, 위원장 변정수)는 2004년 12월27일 128차 회의를 개최하고 ‘민청학련’ 사건을 포함 총 43건을 심의, 이 가운데 33건(33명)을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했다.

주요 인사는 아래와 같다.

▲이해찬은 1970년 3월 서울대 문리대에 입학, 재학 중 1974년 4월3일 ‘민청학련’ 명의로 된 유신체제 비방 유인물을 살포하고 시위를 전개했다. 1974년 9월28일 대통령긴급조치위반, 내란음모죄로 징역 10년을 선고 받았고 1980년 5월2일~5월17일까지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 1980년 7월28일 서울대에서 제명처분을 받았다.

▲이철은 1973년 11월 중순경부터 전국적인 학생조직을 통한 반정부 데모 계획을 수립하고 학생 등을 포섭했으며, 1974년 3월7일 유인태 등과 함께 유신헌법 폐지, 긴급조치 철폐를 주장하면서 반정부 단체 구성을 주도했다. 1974년 4월4일 ‘민청학련’ 명의로 된 긴급조치에 반박하는 성명서 제작에 참여, 1974년 7월13일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제4호 위반, 내란예비음모죄 등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1974년 7월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됐다.

▲유홍준은 서울대 문리에 재학 중 1974년 4월4일 ‘민청학련’ 관련자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1974년 4월11일 긴급조치 제4호 철회를 요구하는 반박 성명서 제작에 참여하는 등 ‘민청학련’ 활동에 적극 가담했다. 1974년 9월23일 대통령긴급조치 위반으로 징역 7년 선고를 받고 1974년 12월3일 서울대에서 유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유인태는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에 재학 중 1971년 10월17일 교련반대 데모를 주도, 1971년 10월17일 대학에서 제명됐다. 1973년 11월 말 전국대학을 대상으로 반정부 세력포섭을 주도했다. 1974년 3월7일에는 유신헌법 폐지, 긴급조치 철회 등을 위해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다가 1974년 7월13일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제4호 위반, 내란예비음모죄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1974년 7월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됐다.

▲이근성(現인터넷 매체 <프레시안> 상임고문)은 서울대 문리대 재학 중 1974년 2월 유인태 등과 함께 전국 단위의 반정부 학생조직 구성을 모의했다. 1974년 3월7일 유신헌법 폐지 등을 위해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다가 1974년 9월7일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제4호 위반, 내란예비음모죄 등으로 징역 20년 자격정지 15년 선고 받았다.

< 제128차 민주화운동 인정 대상자 명단 >

성 명 생년월일 신청유형

오관영 63-11-18 명예회복
전계룡 65-07-03 명예회복
정기효 66-10-10 명예회복
최종경 57-07-04 명예회복
조병도 60-09-12 명예회복
임란 63-12-27 명예회복
이봉숙 61-04-02 명예회복
유재흥 59-02-15 명예회복
이민구 56-01-04 명예회복
이병호 55-04-05 명예회복
최영인 63-07-31 명예회복
임동성 66-02-06 명예회복
김상록 57-01-17 명예회복
임영천 42-01-16 명예회복
이해찬 52-07-10 명예회복
정환춘 53-09-25 명예회복
이구락 54-11-01 명예회복
유인태 48-09-05 명예회복
서창석 52-07-03 명예회복
이철 48-03-18 명예회복
이규상 39-07-19 명예회복
이근성 51-01-25 명예회복
유홍준 49-01-18 명예회복
박인수 64-11-18 명예회복
정봉채 61-02-18 명예회복
김용수 63-04-18 명예회복
안상섭 54-01-03 명예회복
주종섭 64-03-18 명예회복
김재운 61-01-02 명예회복
임상원 62-04-09 명예회복
장영선 65-10-24 명예회복
박영철 66-11-07 명예회복
주태균 66-08-27 명예회복

▲2005년 12월 국정원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는 “민청학련 사건은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를 인민혁명 시도로 왜곡한 학생운동 탄압사건”이라고 발표했다. ▲2009년 9월 사법부는 이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 “내란죄로 인정할 증거가 없다”면서 무죄를 선고했다. ▲2010년 10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이 사건의 관련자와 가족 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유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오히려 가해자가 돼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면서 국가가 520억여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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