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민주혁명당 (민혁당) 사건

1999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은 1999년 국정원에 의해 그 전모가 알려졌다. 공안당국은 1999년 9월 80년대 운동권에서 이른바 ‘주사파’로 활동한 핵심들이 북한에 포섭되어 조선노동당에 가입한 뒤, 남한 내 지하당인 민혁당을 구축한 사실을 밝혀냈다. 공안당국은 민혁당의 실체를 밝혀낸 뒤 총책 김영환을 비롯, 曺裕植(조유식, 前 월간 《말》기자), 하영옥, 심재춘, 김경환, 前《말》지 기자) 등 5명을 국가보안법 위반(간첩) 혐의로 구속했다.

사건설명

민혁당의 뿌리는 1980년대 후반 결성된 반제청년동맹이다. 반제청년동맹은 1987년 2월 검찰수사로 조직원들이 검거됐음에도 불구하고 1991년까지 반제청년동맹 중앙위원회 이름의 유인물이 학원가에서 발견됐다.

반제청년동맹은 1992년 3월 민혁당으로 개편됐다. 중앙위원은 김영환(現 사단법인 시대정신 편집위원), 하영옥, 朴 모씨 등 3명이었다. 김영환의 권유로 반제청년동맹에 가입했다가 민혁당에 합류, 1996년까지 활동했던 홍진표(現 사단법인 시대정신 이사)의 회고에 따르면 김영환은 민혁당 결성 당시 재야와 전북위원회를 관장했고, 하영옥은 영남위원회와 경기 남부지역을 관장했다 한다. 영남위 산하에는 부산위원회, 울산위원회, 마산·창원·진주 지부가 있었다. 김영환은 1991년 5월 잠수정을 타고 북한으로 밀입국해 김일성을 직접 만나보는 등 북한사회를 체험한 후 북한체제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북한과 거리를 두면서 민혁당 내부에서 기관지 기고를 통해 ‘수령론’, ‘한국식민지론’, ‘프롤레타리아독재론’ 등에 대해 단계적으로 문제제기를 해나갔다. 결국 민혁당 내부에서 북한체제에 대한 태도를 둘러싸고 노선투쟁이 격화되자 김영환은 1997년 7월 하영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앙위원회에서 표결 끝에 2대 1로 민혁당의 해체를 결의했다. 하영옥은 이에 반발, 김영환 그룹을 배신자로 낙인찍고 자신이 관리하던 영남위원회, 경기남부 조직, 대학생 조직 등을 이끌고 민혁당의 재건을 추진했다.

김영환의 민혁당 이탈 3개월 후 울산에서 부부간첩사건이 일어났다. 북한의 사회문화부 소속 남파간첩인 최정남-강연정 부부는 1997년 7월 평남 남포항에서 어선으로 위장한 공작선을 타고 서해의 공해상을 통해 남하, 8월 초 거제도 해안에서 헤엄을 쳐서 상륙했다. 이들은 10월27일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 산하 울산연합 소속 주사파 활동가인 정대연(現 한국진보연대 집행위원장)에게 접근했다 현장에서 검거됐다. 정대연은 최정남 부부가 자신에게 접근해 온 것을 안기부의 공작으로 오인하고, 이들을 경찰에 신고했다. 최정남은 현장에서 체포되고 妻 강연정은 독약을 먹고 병원에 실려 갔으나 사망했다. 최정남의 체포로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高永復(고영복, 2011년 2월24일 사망)이 고정간첩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대연은 당국의 계속적인 감시를 받던 중 이른바 영남위원회 사건이 발각되어 다른 관련자들과 함께 검거됐다.

부산경찰청 보안수사대는 1998년 7월 박성수(민노총 울산지역본부 교육선전국장), 김명호(전국금속산업노조연맹 울산본부 정책부장), 정대연 등 울산지역 노동·시민단체 회원 16명을 국보법 위반 혐의로 긴급체포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들의 혐의는 1989년 서울대에서 ‘반제청년동맹’을 결성한 뒤 1992년 ‘영남위원회’를 조직, 부산과 울산의 노동현장에서 利敵표현물을 배포하고 불법파업을 선동한 것이었다. ‘영남위원회’는 김영환이 민혁당을 해체한 다음 하영옥에 의해 조직된 민혁당의 하부조직이다. 다만 ‘영남위원회’가 민혁당과 관련이 없는 독자 조직 내지 반제청년동맹의 하부조직인 것처럼 발표된 데는 당시까지 수사당국이 민혁당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다.

홍진표 씨의 증언에 따르면 부부간첩이 정대연에게 접근했을 때 그들은 “김영환의 소개로 찾아왔다”고 말했기 때문에 당국은 김영환의 집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우연히도 김영환은 그 때 중국에 체류하고 있었다. 공안당국은 부부간첩이 상부의 지시로 편의상 김영환의 이름을 거론했다는 결론을 내려 김영환의 밀입북과 민혁당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했다. 민혁당의 단서가 포착된 것은 그로부터 약 1년 반 후인 1998년 12월 남해상에서 해군에 격침된 북한의 對南공작용 반잠수함이 인양되면서 부터였다. 잠수함 안에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과 위조 주민등록증 등 남파간첩의 유류품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김영환이 “수령론은 거대한 사기극”이라는 등 북한 비판을 가하고 연락도 단절하자 하영옥을 그의 대타자로 지목하고 공작원을 남파, 하영옥과 접촉케 함으로써 민혁당을 지도-검열코자 했다.

북한 공작원과 만난 하영옥은 같이 越北하려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공작원만 북측으로 귀환하려다가 그가 탄 공작선이 격침된 것이다. 국정원은 잠수정 안의 공작원 시신으로부터 하영옥에 관련된 문서와 사진들이 나오자 그를 24시간 밀착 감시, 그와 접촉하는 민혁당 관계자들을 파악하게 됐다. 중국에 체류 중이던 김영환은 1999년 8월 잠수함 침몰로 민혁당의 실체가 당국에 파악된 줄을 모르고 귀국했다. 그는 자신의 밀입국사실 정도를 수사당국에 자백할 생각이었으나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민혁당 관련사실을 당국이 파악한 것을 알아차리고는 월간《말》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간첩사건이 조작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8월19일 출국하려다가 체포됐다. 그가 기자회견을 한 것은 민혁당 관련자들에게 도피하라고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당황한 수사당국은 의도적으로 잡지 않고 있던 하영옥과 沈載春(심재춘, 대학강사)을 199년 8월 19일과 20일 긴급히 체포하게 된다.

국정원은 하영옥-심재춘의 긴급체포한지 한 달 후인 1999년 9월 80년대 학생 운동권에서 이른바 ‘주사파’로 활동한 핵심들이 북한에 포섭되어 조선노동당에 가입한 뒤, 남한 내 지하당인 민혁당을 구축한 사실을 밝혀냈다고 발표했다. 국정원은 격침된 북한 반잠수정에서 발견된 유류품을 단서로 민혁당의 실체를 밝혀내고, 총책 김영환을 비롯, 曺裕植(조유식, 前 월간 《말》기자), 하영옥, 심재춘, 김경환, 前《말》지 기자) 등 5명을 국가보안법 위반(간첩) 혐의로 구속했다고 밝혔다.

국정원은 이들 가운데 김영환과 조유식의 경우 잘못을 뉘우치고 수사에 협조해온 점을 고려해 公訴保留(공소보류) 의견으로, 하영옥, 심재춘은 起訴(기소)의견으로 각각 검찰에 송치하고, 김경환에 대해서는 계속 수사 중이라고 밝혔다. 국정원은 1980년대 학원가에 ‘강철 시리즈’를 배포해 ‘주체사상 이론가’로 알려진 김영환은 1989년 7월 남파간첩 윤택림(북한 대외연락부 5과장)에게 포섭되어 노동당에 입당한 뒤, 대학 후배인 조유식과 함께 1991년 5월 강화도 해안에서 북한 반잠수정을 타고 황해도 해주로 入北했다고 밝혔다. 두 사람은 북한에서 14일 동안 머물며 김일성과 두 차례 면담하고 훈장을 받은 뒤 서해를 거쳐 제주도 인근 해안으로 되돌아왔다. 김영환은 1991년 8월 북한 공작원이 매설한 강화군 외포리 해안 드보크에서 미화 40만 달러와 권총 2자루, 무전기 3대, 난수표 등을 확보한 뒤 1992년 3월 북한의 지령대로 주사파 조직인 반제청년동맹을 주축으로 민혁당을 결성하고 이어 1992년 대통령선거동향 등을 수집해 북한에 보고했다. 그는 이 공작금으로 1996년 총선 때 출마한 李 모씨, 1995년 지방자치단체 선거 때 구청장으로 출마한 金 모씨 등 6명에게 1인당 5백만 원 씩 모두 4천5백만 원을 선거자금으로 건넸다. 반성문을 쓰고 公訴保留된 김영환은 이후 북한민주화네트워크(북민넷)를 결성해 북한인권운동에 투신했다. 반면 하영옥은 민혁당 사건으로 1999년 9월 구속되어 8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2003년 4월 특별사면으로 대전교도소에서 출소했다. 월간《말》지 정치팀장이었던 김경환은 민혁당 조직원으로 남파간첩을 접촉하고 방조한 혐의 등으로 구속돼 징역 4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2002년 수감 중 옥중 산문집《비상을 꿈꾸는 새는 대지를 내려다 본다》를 출간한 뒤 2003년 4월 석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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