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혁명당(통혁당) 사건

1968

통일혁명당(통혁당) 사건은 해방 이후 북한의 전형적인 對南 공작사업에 의해 결성된 남한 내 지하당이다. 사건 주범 김종태는 북한의 對南사업총국장 허봉학으로부터 직접 지령과 공작금을 받고 남파된 거물간첩이었다. 그는 운수업으로 위장해 통혁당을 조직하고, 前 남로당원-학생-청년 등을 대량 포섭했다. 그리고 결정적 시기가 오면 무장봉기하여 수도권을 장악하고, 요인암살-정부전복을 기도하려 하다가 공안당국에 의해 일망타진됐다.

사건설명

통일혁명당(통혁당) 사건의 실체

통일혁명당(통혁당)은 해방 이후 북한의 전형적인 對南 공작사업에 의해 결성된 남한 내 지하당이다. 북한은 간첩을 남파시켜 남로당 활동을 했던 左翼 인물 중에서 주요 인자를 포섭하여 越北시킨 후 이들을 통해 지하당 구성을 지령하고, 자금 등 활동 내용을 지원했다.

1961년 12월28일 북한은 간첩 김수영을 荏子島(임자도)에 침투시켜 동생 김수상(김송무)과 외삼촌 최영도는 북한에서 ‘조선노동당’에 입당하고 6개월간 간첩교육을 받은 후 지하당 조직 구성 지령을 받고 다시 荏子島로 침투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김수영은 1965년 3월 또 다른 荏子島 출신 정태묵을 포섭, 그를 대동하고 越北했다. 정태묵은 북한에서 조선노동당 연락국장 이효순과 만나 조선노동당에 입당하고 지하당 조직방법 등을 교육받은 후 무전기 3대, 난수표 1매를 받아 복귀했다. 이를 통해 최영도, 김수영, 정태묵에 의해 荏子島를 거점으로 하는 전라남도 지하당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김수영에 의해 越北하여 6개월간 간첩교육을 받은 김수상은 지하당 조직구성의 적임자로 본인이 알고 있던 대구 출신 김종태를 북한 對南工作 지도부에 추천했다.

최영도를 만난 김종태는 조선노동당에 입당하고 평양 교외의 초대소에 머물면서 공산주의 사상, 지하당 공작방법 및 난수표 해독법 등을 교육받았다. 또한 “남조선 혁명기운 조성을 위해 주변 인물들을 포섭하고 지하당을 건설할 것, 합법적인 출판물을 발간하여 청년학생-지식인층에게 反美-反국가사상을 고취할 것” 등 김일성이 내린 지령을 전달받았다.

다시 남한으로 귀환한 김종태는 1964년 6월 중순경 조카 김질락, 김진환(김질락의 서울대 동문) 김진환-이문규 등을 포섭해 월간지《청맥》을 창간-운영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65년 11월 김질락, 이문규 등과 함께 통혁당을 창당했다.

통혁당의 검거 경위에 대해서는 몇 가지 상이한 설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최영도 동생의 밀고’라는 기록이며, 이는 당시 검거 및 수사 총책임자였던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회고록에 근거한 것이다. 두 번째는 ‘김질락 동생의 밀고’라는 기록이며, 이는 김질락의 친동생 김승락이 자신의 입으로 증언한 내용에 근거한 것이다. 세 번째는 전 중앙정보부 수사과장 이용택의 증언이다. 네 번째는 간첩출신 김용규, 신평길 등의 증언이다. 김용규와 신평길의 증언 사이에 내용상 약간의 상이한 점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정태묵과 정태연 그리고 정태연의 처 등 3인의 갈등이 있었고, 정태연의 妻(처) 또는 정태묵 이웃의 신고로 인해 통혁당의 실체가 司直當局(사직당국)에 알려지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1969년 1월25일 서울형사지법 합의6부는 통혁당 사건 선고 공판에서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 이관학, 송승환 등 5명의 피고인들에게 국가보안법, 반공법, 형법(간첩죄), 내란예비음모죄 등을 적용해 사형을 선고하고 이재학, 신광현, 정종운, 오병철 등 4명의 피고인들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또 윤상환 등 나머지 21명의 피고인들에게 최고 징역 15년에서 징역 2년을 선고하고 같은 기간의 자격정지형을 병과하는 등 관련 피고인 30명 전원에게 有罪선고를 내렸다. 1969년 5월26일 서울고법 형사부는 통혁당 사건 항소심에서 김질락, 이문규, 이관학, 김승환 등 4명의 피고인들에게 국보법, 반공법, 형법(간첩죄) 등을 적용, 원심대로 死刑을 선고했다. 그리고 신광현, 정종훈, 이재학, 오병철 등 4명의 피고인들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대법원 제3부는 1969년 9월 김종태를 비롯한 피고인들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김종태의 入北(입북)과 통혁당 창당

북한에서 차관급 대우를 받는 공작원으로 활동하다가 1976년 9월 귀순한 김용규氏는 통혁당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는 조선노동당의 지시로 통혁당 재건 계획에 직접 관여했던 인물이다.

《통일혁명당은 1961년 12월, 전남 무안군 荏子島에서 면장을 지냈던 지방유지 최영도가 생질인 남파 공작원 김수영에게 포섭되면서 시작됐다. 최영도는 세 차례에 걸쳐 평양을 다녀오면서 조선노동당에도 입당했다. 전남도당 책임자가 된 최영도는 지하당 조직망을 확산하는 한편 과거 남로당에서 전남도당 위원장직을 맡았다가 수사기관에 체포돼 10년 형을 살고 나온 정태묵을 포섭하는데 성공했다. 북한은 최영도의 조직을 전라남도 지도부의 正組織(정조직)으로, 정태묵의 조직은 후보조직으로 二元化시켜 관리하며 조직을 확산해 나갔다. 노동당 연락부로부터 서울의 유력인사를 포섭하라는 지시를 받은 최영도는 조직을 전라남도 지도부의 正組織으로, 정태묵의 조직은 후보조직으로 二元化시켜 관리하며 조직을 확산시켜 나갔다. 노동당 연락부로부터 서울의 유력인사를 포섭하라는 지시를 받은 최영도는 조카인 김수상을 내세워 김종태를 포섭하기로 했다. 反정부 감정을 갖고 있던 김종태는 오히려 본인이 더 적극적으로 북쪽과 선을 닿게 해달라고 요청함으로써 포섭이 쉽게 이루어졌다. 평양으로 밀입북한 김종태는 간첩교육을 받는 한편 김일성과 만나기도 했다. 간첩교육을 받은 후 다시 남한으로 돌아온 김종태는 김질락, 이문규 등 친척, 친우 등 측근들을 손쉽게 규합해 통혁당 서울시 지도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1968년 8월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직이 적발됨으로써 통혁당을 赤化統一의 전진기지로 삼으려던 북한의 계획은 일단 좌절됐다. 나는 1973년 7월 남파됐을 때 직접 통혁당 재건 공작계획에 참여하기도 했다. 포섭 대상은 과거 김종태와 연계됐던 인물들이었다.》

김종태는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1950년 3월에 동국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학생시절 左翼단체에 가입해 활동했으며, 대구폭동에 가입했다는 기록도 있다. 대학 졸업 후 안동사범과 포항고등학교에서 일시적으로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54년 4월부터 1958년 5월까지 친형이자 자유당 국회의원인 김상도의 개인비서로 일했다. 김종태의 '대구폭동 가담' 등 左翼전력을 눈여겨 본 북한은 김수상으로 하여금 최영도와 함께 김종태를 만날 것을 지시하고, 이들을 만난 김종태는 최영도가 자신보다 먼저 북한에 다녀왔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데다 김수상으로부터 북한의 발전상을 전해듣고 북한에 가보기로 결심하게 됐다. 김종태는 총 4회에 걸쳐 越北했는데, 1차 越北은 1964년 3월26일 남파간첩 김수상의 안내를 받아 임자도를 통해 이뤄졌다. 김종태는 첫 越北에서 북한의 환대를 받으며 조선노동당에 입당하고, 이후 평양 교외의 초대소에 머물면서 공산주의 사상, 지하당 공작방법 및 난수표 해독법 등을 교육받았다. 또한 김종태는 對南사업 총국장 이효순으로부터 “남조선 혁명기운 조성을 위해 주변 인물들을 포섭, 지하당을 건설할 것, 합법적인 출판물을 발간하여 청년학생-지식인층에게 반미-반국가사상을 고취할 것” 등 김일성이 내린 지령을 전달받았다.

남한으로 귀환한 김종태는 1964년 6월 중순경 조카 김질락, 김질락의 서울대 동문 김진환-이문규 등을 포섭하는 등 북한 공작지도부의 지령을 수행했다. 1965년 4월 김종태는 荏子島를 통해 2차 越北, 평양으로 들어갔다.

평양에서 김종태는 對南사업 총국장 이효순으로부터 “남조선 혁명은 남조선 인민의 힘으로 해야한다”, “남조선에 지하당을 창당하고 명칭은 통혁당으로 하라”는 지령을 받고 귀환했다. 이후 김종태는 1965년 11월말 서울 서대문구 소재 자기 집에서 김질락-이문규 등과 회합하고, 정식으로 통혁당을 결성, 지도부를 구성한 후 자신이 黨首로 취임했다.

아래는 당시 김종태의 발언을 김질락이 자신의 저서인 <주암산>에서 기술한 내용이다.

《동지들은 그동안 열심히 일했고, 열심히 공부했소. 동지들은 참으로 많이 발전했소. 동지들은 이제 훌륭한 한 사람의 혁명가로 손생이 없다고 생각하오. 우리는 언제까지나 이런 상태로 계속할 수는 없소. 우리는 이제부터 우리들의 역량을 총화하고 보다 목적의식적으로 행동해야 할 줄 아오. 祖國은 우리들을 필요로 하고 있고, 우리는 祖國의 부름에 마땅히 응해야 할 역사적 사명을 지니고 있소. 나는 이제부터 우리들의 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지하당을 조직할 것을 여러분에게 제의합니다.》

<주암산>에 따르면 통혁당 창당 당시 과정에서 북한과의 관계설정 문제가 가장 민감한 사안 중 하나로 등장했는데, 김종태는 “조직 가운데 북한의 선이 절대로 침투해 들어와서는 안 되며 그들과의 접촉은 단절되거나 사전에 봉쇄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북으로부터 여러 가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서 도움을 받는 것이며 북한의 명령을 받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추가했다. 참가자들은 남한의 독자적 前衛黨이라는 점에 동의했다. 그러나 김종태는 이미 북한과 연결돼 있었는데 당시에는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셈이다. 이후 회의에서 이영수(김질락의 가명), 조성일(이문규의 가명)에게 백두5호, 백두6호를 김종태 자신은 백두1호의 黨번호를 부여했다.

김질락이 “그럼 백두 2,3,4는 누구인가”를 묻자 “黨의 규율문제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고 답변했는데, 훗날 임자도 사건으로 알려진 전라남도 지하당 관련자들일 가능성이 높다. 이후에도 김종태는 1966년 8월에 3차 越北, 1968년 4월에 4차로 越北했는데, 4차 越北당시 이문규가 제주도까지 동반했다. 이들은 1968년 4월22일 비행기 편으로 제주도로 이동하여 제주시에서 1박 한 후 서귀포에서 고정간첩 2명과 접선하였다.

이문규는 비행기 편으로 서울로 돌아가고 김종태 등 3인은 공작선 편으로 越北하여 4월25일 평양에 도착했다. 김종태는 단기 간첩교육을 받고 지령을 수수한 다음 5월2일 평양을 출발해 서귀포 해상을 거쳐 제주도로 도착했다. 그리고 미리 대기 중이던 이문규와 3일간 체류하면서 향후 활동 방안 등을 상의하고 5월7일 비행기 편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이 같이 김종태는 총 4차례에 걸쳐 越北하여 김일성을 비롯한 이효순, 허봉학 등 북한 고위층과 접촉하면서 남한 혁명에 관해 논의하고 직접 지령을 받았으며 A-3 지령도 167회나 수신했다.

통혁당의 조직

통혁당은 당시 한반도의 정세를 “장차 무력투쟁을 위한 역량축적 단계”로 규정하고 전 남로당계 조직을 부활시키는 방향으로 조직을 확대하는 한편, 좌파 지식인-청년학생층을 대상으로 조직확대사업을 전개했다. 통혁당 관련자 158명 중 당 지도부를 위시한 주요 간부 대부분이 1950년대에 계, 친목회, 등산회, 비밀동아리 등을 조직해 꾸준히 비합법 조직을 확대해 왔던 前 남로당 계열로 구성됐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서울대 문리대 등 각 대학 출신 인텔리들을 규합, 조직을 확대했다. 통혁당은 좌익투쟁 경력이 있는 남로당 출신 인물들을 이른바 ‘精髓(정수)조직’으로 지하에 잠복시키는 한편 합법적 지위가 튼튼하여 사회적으로 의심받지 않는 인물들을 표면에 내세워 활동했다.

통혁당은 창당 후 위원장 김종태, 민족해방전선 책임비서 김질락, 조국해방전선 책임비서 이문규로 조직 체계를 구성하고 조직확대에 착수했다. 김질락은 김종태의 親조카로 어린 시절부터 김종태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고 대학생 시절부터 좌익 서클 활동을 했다.

1964년 2월 고향인 경북 영천에 내려온 김종태로부터 “너는 조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는 부르주아 근성을 버리고 혁명성을 가져야 한다”며 서울로 함께 올라가서 잡지를 만들자는 말을 듣고, 1964년 6월 상경하여 <청맥>발간을 준비하고 잡지 主幹(주간)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김종태가 갖고 있던 <마르크스-엥겔스 전집>, <레닌전집>, <스탈린전집> 등을 빠짐없이 읽고 <자본론>, <변증론>, <제국주의론>, <무엇을 할 것인가> 등을 비롯하여 <사적유물론>, <철학사전>등을 탐독했다.

김종태는 통혁당을 창당한 이후에 후배인 이진영, 신영복에게 사회주의 혁명의 불가피성과 혁명의 목적 등에 대한 교양을 했다. 그리고 민족해방전선 지도부를 구성하고, 산하에 새문화연구소, 청년문학가협회, 불교청년회, 민족주의연구회, 경우회, 동학회, 기독청년경제복지회, 청맥회 등 8개 대중단체를 조직해 대중적 기반 확보를 위한 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각 동아리를 주도하는 책임자를 중심으로 因子(인자)를 선발해 통혁당 소조를 조직했다.

이문규는 평안북도 출신으로 해방 후 월남하여 대구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에 4.19의 선구로 알려진 신진회의 주요 간부로 활동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김질락의 제의로《청맥》의 편집책임자가 되어 활동하면서 청년학생, 지식인에게 반미-반정부 사상을 고취시켜 현실 불만을 유도하는 한편, 평소 사상적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이재학, 윤상환, 오병철 등을 조직해 <조국해방전선> 지도부를 구성했다. 1967년 5월에는 산하에 학사주점을 만들고 이 모임을 기반으로 서울의 명동, 광화문과 각 지방 주요도시에 지점을 설립해 운영했다. 김질락과 이문규는 김종태의 제의에 따라 1967년 5월5일 목포에서 공작선을 타고 밀입북하여 5월28일까지 평양에 체류하면서 조선노동당에 입당하고 공작금 등을 받아 서울로 복귀했다.

무장투쟁 준비

통혁당은 게릴라식 무장투쟁으로 혁명을 완수하겠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그리하여 모택동 전법과 베트콩 게릴라 전법 및 동학혁명식 민중봉기 전법을 모방해 무장투쟁을 현실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를 진행했다. 이와 관련 통혁당은 북한과의 합의하에 농촌에서는 테러투쟁으로, 도시에서는 폭발물을 이용해 주요시설과 청와대를 폭파하는 등 무력투쟁으로 사회혼란을 조성하기로 했다. 조직원 이진영, 오병현을 특수전술교관 후보로 선발, 1968년 4월 월북시켜 무력투쟁을 위한 고성능 무기 및 폭발물 취급 등 특수교육을 받게 했으며, 유사시에 대비해 각 지역에 무기고 획득과 무기 비축방법 등을 연구하고 지형 정찰을 실시했다. 또한 유격전에 대비한 신체훈련과 더불어 사상토대 강화훈련을 병행했으며, PS작전(from paper to steel) 등 실제 무력투쟁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수립했다.

통혁당 재판결과

1969년 1월25일 서울형사지법 합의6부는 통혁당 사건선고 공판에서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 이관학, 송승환 등 5명의 피고인들에게 국가보안법, 반공법, 형법(간첩죄), 내란예비음모죄 등을 적용해 사형을 선고하고, 이재학, 신광현, 정종운, 오병철 등 4명의 피고인들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또 윤상환 등 나머지 21명의 피고인들에게는 최고 징역 15년에서 징역 2년을 선고하고 같은 시간의 자격정지형을 병과하는 등 관련 피고인 30명 전원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1심 재판과정에서 김종태는 “우리는 우리들 나름으로 민족통일운동을 전개했을 뿐, 어떤 누구의 지령에 의해서 행동한 것이 아니다...(중략) 통혁당을 조직한 것은 사실이다. 그 투쟁방침과 강령은 내가 독자적으로 만들었다...(중략) 朴정권 타도운동은 역사적으로 보나 現下(현하) 한국의 정세로 보나 애국적인 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긍하는 당연한 일이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잡지《청맥》대표 김진환은 “《청맥》의 편집방침을 반미적-반정부적인 방향에 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공화국이 주장하는 조국의 자주독립, 외세배격을 主(주)내용으로 한 것도 사실이지만 표면적으로는 민족주체성, 민족자주의식을 환기시키기는 정도에서 자제했다”라고 말했다.《청맥》의 주간 김질락은 1심 재판과정에서 “반미-반제국주의를 전면에 내거는 것은 공산주의자의 ABC이다. 우리는《청맥》의 지면을 통해서 광범위한 국민대중의 반미-반정부투쟁을 선동했다”고 말했다. 학사주점 대표 이문규는 “朴 정권 타도는 국민의 기본권에 속하는 문제이다”, “학사주점을 인민의 광장으로 이용할 목적은 있었으나 실천단계에 이르진 못했다”고 밝혔다.

1969년 5월26일 서울고법 형사부는 통혁당 사건 항소심에서 김질락, 이문규, 이관학, 김승환 등 4명의 피고인들에게 국가보안법, 반공법, 형법(간첩죄) 등을 적용하여 원심대로 사형을 선고하고, 신광현, 정종운, 이재학, 오병철 등 4명의 피고인들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1968년 9월29일 투옥된 김종태는 서울구치소를 탈옥, 도주하려다 붙잡혀 특수도주 미수죄가 추가됐다.

통혁당 창당선언문

통일혁명당(통혁당)은 김일성의 통일사업 교시에 입각한 소위 ‘민족해방 통일전선’ 결성을 목표로 합법-비합법-폭력-비폭력 배합투쟁을 전개했다. 1970년까지 결정적 시기를 조성한 후 일제히 봉기해 서울의 국가 주요기관 탈취-요인 체포-살해 등 비합법 폭력투쟁을 감행해 공산정권을 수립하고자 했다. 통혁당은 특히 창당 선언문을 통해 “김일성의 주체사상이 黨(당)의 지도이념임”을 명확히 밝히고 黨의 최고목적이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통혁당 창당선언문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한국 사회의 모순과 병폐의 근원은 美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와 후진적인 식민지 반봉건적인 사회제도에 있음 ▲진정한 자유와 복리를 향유하는 길은 부패 변질된 현존제도를 전복하고 자주적이며 민주주의적인 새 사회제도를 수립하는 것임 ▲한국에서 혁명은 필연적이고 불가피하며, 한국혁명은 한국인민의 주동적 역할에 의해 수행돼야 하며, 혁명이란 반혁명세력에 대한 혁명세력의 판갈이 싸움으로 反혁명은 오직 폭력혁명에 의해서만 타도될 수 있음 ▲혁명의 승리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혁명역량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혁명역량을 편성, 성장 발전시키는데서 중핵으로 되는 것은 혁명의 조직자이며 향도력인 黨이 가지는 것임 ▲통혁당은 그 계급적 기반과 지도이념, 투쟁목적상 일체 기성 정당파 정당들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새 형의 마르크스-레닌주의 黨으로 노동계급과 농민을 위시한 근로인민대중의 이익을 대변해 옹호함 ▲통혁당의 지도이념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現 시대와 우리 조국 현실에 독창적으로 구현한 김일성의 주체사상임 ▲黨의 최고목적은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며, 당면 목적은 한구에서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수행해 부패한 식민지 반봉건적인 사회제도를 전복하고 인민민주주의 제도를 건립하며 나아가 국토통일의 대업을 성취하는 것임.

통혁당의 강령

통혁당의 투쟁과제는 12개조 강령을 통해 제시됐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美제국주의 식민지 통치의 철폐와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

일체 애국세력을 총집결하여 거족적 反美구국항쟁으로 식민지 통치를 전복한다. 침략군을 구축하고 군사기지를 철폐하며 美제국주의의 군사적 강점을 종식시킨다. 미국의 현지 침략 기구를 분쇄하고 예속적 협정, 조건들을 무효화한다…(중략) 노동자, 농민, 진보적 지식인, 도시소자본계급과 양심적 민족자본가 등 각계각층 인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자주적 인민민주주의정권을 수립하여 정치적 독립을 성취한다.

2. 파쇼 독재체제의 소탕과 사회정치생활에서 민주주의 실현

중앙정보부를 위시한 정보, 경찰, 사법, 검찰 등 폭압기구를 해체하고 ‘국가보안법’, ‘반공법’ 등 모든 반민주적인 악법을 폐기하며 애국자들과 무고한 인민들을 학살한 ‘파쇼’ 원흉들을 처단하고 ‘정치범’들은 무조건 석방한다. 인민보안대를 창설하고 민주적 사법, 검찰제도를 확립하여 혁명의 쟁취물과 인민의 생명, 재산을 보호한다. 민주민권에 대한 일체 침해행위를 엄금하며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시위 및 신앙 등 민주주의적 자유와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한다. 선진사상의 선택과 그 선전의 자유, 각계각층의 권익을 대변하는 민주적 정당단체들의 조직과 그 활동의 자유를 확고히 담보한다. 주거, 이동, 직업선택의 자유와 인격, 주택의 신성불가침, 서신의 비밀을 엄격히 보장하며 소수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만 18세 이상의 공민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한다.

3. 농어촌의 세기적 낙후성과 빈궁의 일소

민주적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농민들의 봉건적 억압과 착취에서 완전히 해방한다. 논 3정보, 밭 5정보 이상의 지주소유 토지와 소작지는 무상몰수하고 그 이하의 소지주, 부농들의 소작지는 매상하고 토지가 없거나 적은 농민들에게 무상분여한다. 反美구국사업에 공헌한 애국자의 소유토지는 그 규모에 관계없이 매상한다. 산림, 관개수리시설을 국유화하여 농민들의 공익을 도모한다. 軍징발토지를 해체하고 휴전선일대의 농경지를 복구하며 서해 간척지와 산간지대 토지를 대대적으로 개간하여 貧苦(빈고)농들에게 추가 부여함으로써 농호당 소유토지를 1.4정보 이상으로 확장하여 영세농민들의 토지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다. 어민들을 전근대적 착취에서 해방하고 어로활동의 자유와 어민의 생활안정을 기한다. 영세어민들에게 어선, 어구 및 어업자금을 국가적으로 보장해주며 국영수산기업소를 창설하는 동시에 국가의 물질, 재정적 지원 하에 자원적 원칙에서 수산업협동조합을 광범히 조직하여 어민들의 처지를 근본적으로 개선한다.

4. 중요산업의 국유화와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

외국독점자본과 매판자본가 소유의 공장, 광산, 은행, 산업기관 등을 몰수, 국유화하여 민족 산업 발전과 인민복리 증진에 활용하는 동시에 외세에 의한 경제농민과 소수특권층의 경제독점을 제거한다. 민족자본가, 수공업자, 소상인들의 기업 활동을 보호하고 그들의 창의를 장려하여 민족경제건설에 기여케 한다. 경제구조의 식민지적 파행성을 타파하고 확고한 자립적 민족경제의 기반을 구축한다. 경제 각 분야에서 미국 원조의 後果(후과)를 일소하고 외국자본의 유입을 방지하며 대외무역의 국가통제를 실시하여 외세의 경제적 압력으로부터 민족경제를 보호한다. 국내자원을 적극 개발이용하고 자체의 원료, 자금, 기술에 입각한 자립적 민족 산업을 발전시켜 경제의 대외의존성에서 완전 탈피한다. 군사비와 행정 관리비를 대폭 축소하여 생산적 투자를 증대하는 동시에 남북경제 교역을 실현하여 상호 경제협조를 강화하고 남북경제의 균등적, 공동적 발전에 기여한다.

5. 민주적 노동법령의 실시와 노동자들의 사회경제적 처지의 개선

새로운 민주적 노동법령을 제정하여 노동자들의 민주적 권익을 실질적으로 보장함으로써 그들을 국가, 경제 관리에 적극 참여케 한다. 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2~3주의 유급휴가제, 국가 기업소 부담에 의한 사회보험제를 실시하며, 모든 근로자들에게 안정된 직업을 주어 실업자, 반실업자들을 완전히 퇴치한다. 前近代的(전근대적) 고용제도와 노동조건을 일소하고 노동안전, 노동보호에 만전을 기하다. 무단해고, 임금체불을 엄단하며 취업의 안전성을 보장하고 유해, 위험, 시간외근로에 대한 특별보수제를 실시한다.

6. 여성들의 권익보장과 사회적 지위의 향상

남녀평등권 법령을 제정하여 여성들을 일체 봉건적 속박에서 해방하고 그들에게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분야에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한다. 인신매매, 공창 및 사창제도와 축첩제도를 일소한다.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을 위한 실질적 여건을 조성한다. 모성과 유아를 특별히 보호하며 국영기업의 모성근로자들에게 6시간 근로제를 적용하고 모든 직업여성들에게 산전산후 70일 이상의 유급 휴가제를 실시한다. 여성들의 사회정치 활동과 근로조건을 보장하기 위하여 탁아소, 유치원과 산원을 광범히 설치한다.

7. 민주적 민족문화의 창달과 지식인들의 생활보장

사대주의, 민족허무주의, 부패한 양풍, 왜풍을 배격하고 우리나라의 유구한 문화전통을 계승하여 민족주체성에 입각한 민주적 민족문화를 발전시키며 민족자주성고 애국사상을 함양한다. 언론, 교육, 과학, 기술, 문화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지식인들의 직업을 국가적으로 보장하며 그들의 생활을 안정시킨다. 창작, 연구조건을 개선하기 위하여 문화, 과학연구기관들은 대폭증설하며 지식인들의 재능을 발양시켜 새 사회건설에 적극 기여케 한다. 남북문화교류를 추진하여 단일한 민족문화 발전을 도모하며 외국의 선진문화와 과학기술을 흡수한다.

8. 교육의 쇄신과 근로자 자녀들에 대한 무료교육제-장학금제 실시

숭미반공적 반동교육제를 청산하고 민주이념의 기초위에서 교육내용을 일신하며 선진적인 인민교육체제를 확립한다. 학원의 군사화와 謀利化(모리화)를 근절하고 학원사철을 엄단하며 학원 내 민주주의를 보장한다. 근로자들을 자녀교육에 대한 부담에서 해방하고 모든 청소년들에게 취학의 기회를 제공한다. 국가부담에 의한 전반적 중등의무교육제를 실시하고 각종 잡부금, 공납금제를 철폐하는 동시에 고학생들과 고등 및 대학생들에게 광범위한 국가장학금제를 실시한다. 노동연령에 달한 각급학교 졸업생들에게 국가적 직업을 알선한다.

9. 선진적 보건제도의 확립과 광범한 무료치료제 실시

금전본위의 상업적 보건제도를 쇄신하고 모든 주민들이 치료비 걱정 없이 의료혜택을 받는 인민보건제도를 확립한다. 의료비의 일부 혹은 전부를 국가가 부담하는 의료보험제를 실시하여 노동자, 빈농민과 도시빈민에 대해서는 완전무료치료제를 적용한다. 방역, 위생 사업을 강화하여 각종 전염병, 토질병을 근절하고 노동자들의 고용증진을 도모한다. 국가의료기관을 대폭 확충하여 모든 면-리에 진료소를 설치한다.

10. 자위적 민족군대 창설

일체 침략군사협정을 폐기하고 군사고문제를 철폐하며 군통수권을 회복하여 자주방위를 실현한다. 국군을 개편하여 애국청장년들로 자위적 민족군대를 창설한다. 조국과 민족을 배반한 극소수 악질상층장교들을 엄벌하고 反美구국사업에 참가한 장교는 중용한다. 강제징집제도, 향토예비군제도, 학도군사훈련제도를 철폐하고 자원병제를 실시하며 군사제도를 개편한다. 사병들을 군사관리에 적극 참여케 하고 그들의 인권을 보장하며 사병의 노예화와 기합을 포함한 일체 인신모욕을 엄단하고 영창제도를 폐지함으로써 군대 내 민주주의와 관병일치의 기풍을 확립한다. 사병들의 처우를 개선하여 그 가족들의 안정된 생활을 국가적으로 책임지며 제대군인들의 직업과 생활을 보장한다. 군대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며 병력을 20만 이하로 감군하고 인민들의 군사비 부담을 대폭 경감한다.

11. 자주외교의 구현과 反帝(반제)평화애호 국가들과의 우호 증진

사대망국적, 외세의존적, 굴욕외교를 지양하고 민족주체이념에 투철한 자주적 외교정책을 실시하여 평등, 호혜, 불간섭의 원칙에서 민주우호국가들과의 친선을 도모한다. 美제국주의의 침략정책과 일본군국주의의 재생을 반대하고 세계피압박민족들의 해방투쟁을 적극 성원한다. 제국주의, 식민주의를 반대하는 모든 나라인민들과 반제반미공동유대를 강화하고 극동과 세계평화에 적극 기여하며 나라의 국위를 만방에 선양한다. 美제국주의자들이 강점 전 기간을 통하여 우리 인민에게 끼친 일체 인적, 물적 피해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행사한다. ‘한일조약’을 백지화하고 과거 식민지 통치기간 일제가 범한 죄악에 대한 혈채를 완전히 청산한 기초위에서 대일관계를 전면 재조정한다.

12.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 성취

반공통일, UN감시하의 통일을 배제하고 일체 외세의 간섭 없이 남북인민들의 자율적 민주의사와 민족주체역량에 의거한 평화적 조국통일을 실현한다. 남북대립과 동족상잔을 고취하는 민족분열주의를 배격하고 긴장상태를 완화하며 민족융합을 위한 평화기운을 조장하고 각방으로 대화의 길을 개척한다. 상호접촉과 상담, 인사내왕, 이주의 자유와 문물의 교류를 실현하며 거족적 평화통일 운동을 전개한다. 혁명이 승리하고 자주적 인민정권이 수립되면 지체 없이 남북협상을 진행하여 쌍방의 합의하에 전쟁상태 종식과 휴전선 철폐에 관한 평화선언을 공포한다. 남북에서 다 같이 정치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기초위에서 쌍방정부의 공동관리 하에 전국 총선거를 통일적 중앙정부를 수립함으로써 민족지상의 과제인 조국통일 위업을 달성한다.

*참고자료

월간조선 2010년 10월호
한기홍著 『진보의 그늘』, 시대정신
김질락著 『어느 지식인의 죽음』(원제: 주암산)
『북의 지령따라 움직이는 사람들』, 비봉출판사
『공안사건기록』, 도서출판 世界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