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인민혁명당
(인혁당) 사건

1974

서도원, 도예종, 이재문 등 1964년 제1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관련자 및 잔존세력들이 출소, 동당(同黨)을 재건하고, 조직원을 학원가에 침투시켜 각종 시위를 배후 조종하다 1974년 공안당국에 적발된 사건이다.

사건설명

제1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발생 후 10년이 지난 1974년 4월25일 제2차 인혁당 사건이 중앙정보부(中情‧중정)에 의해 발표됐다. 신직수 당시 중정 부장은 이른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사건을 발표했는데, 이 때 민청학련의 배후세력으로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인혁당 재건위)가 등장했다.

중정은 인혁당 재건위가 북한의 지령을 받고 인혁당을 재건, 민청학련의 시위를 선동해 1974년 4월3일을 기해 봉기함으로써 정부를 전복하고 민주연합정부를 수립한 연후에 순수한 노농(勞農, 노동자-농민) 정권을 세운다는 4단계 혁명을 기도했다고 밝혔다. 신직수 중정 부장은 민청학련 주동자들이 인혁당 재건위와 일본에 있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으로부터 이중으로 자금지원을 받았으며, 일본공산당 당원 등 2명도 이 사건에 관련됐다고 밝혔다. 이 사건과 관련, 조사를 받은 사람은 1024명(이중 266명 자진신고, 732명 검거)에 달했다. 이 가운데 253명이 군(軍)검찰에 송치되고 26명은 수배되는 한편 745명은 훈계-훈방됐다.

검찰에 송치된 피의자 가운데 54명은 긴급조치 4호 및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內亂)예비음모, 내란선동 등의 죄명으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 기소됐다. 재판은 신속하게 진행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피고인들 특히 인혁당 관계자들과 그 가족들은 1차 인혁당 사건 때처럼 공판과정에서 고문사실과 공판기록 조작의혹을 끊임없이 제기해 재판이 혼란에 빠졌다. 담당 변호사인 강신옥(姜信玉) 변호사는 검찰이 학생들에게 사형을 구형하자 ‘사법살인’이라고 항의하다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군사재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담당 재판부인 육군 비상보통군법회의 제2심판부(재판장 박현식 중장)는 그해 7월 인혁당 관계자 21명 중 서도원(徐道源, 前 대구매일 신문기자), 도예종(都禮鍾), 하재완(河在完), 송상진(宋相振), 이수병(李銖秉), 우홍선(禹洪善), 김용원(金鏞元) 등 7명에게 사형, 김한덕(金漢德) 등 8명에게 무기징역, 황현승(黃鉉昇) 등 6명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軍검찰의 기소내용을 그대로 인정하고, 형량도 軍검찰관의 구형량과 똑같이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평소 공산주의 사상을 품고 북한의 이른바 인민혁명 수행을 위한 통일전선에 영합해 공산국가를 수립할 것을 결의, 인혁당을 조직했다고 밝히고 이들이 학원조직책 여정남으로 하여금 이철, 유인태 등을 포섭, 민청학련을 조직케 함으로써 학생데모와 대중봉기를 유발토록 배후 조종하는 등 내란을 모의했다고 판시했다.

군재(軍裁)는 같은 달 민청학련 사건 관련 학생들에 대해서도 선고공판을 열고, 이철, 유인태, 여정남, 김병곤, 나병식, 김영일, 이현배 등 7명에게 사형, 다른 7명에게는 무기징역, 15명에게는 징역 15~20년을 선고했다. 그해 9월의 육군 비상고등군법회의는 인혁당 관련자 전원에 대해 공소기각결정을 내리고 학원관계자들에 대해서는 여정남에 대해서만 공소를 기각, 사형을 유지하고 이철, 유인태, 김영일 등에게는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는 등 모두의 형량을 줄였다.

‘학생들의 유신반대 데모를 인혁당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몰아붙인 것은 당초부터 조작이었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됐다. 이에 정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이들 학생들을 대부분 형 집행정지 형식으로 석방하는 조치를 취했다. 반면 정부는 인혁당 관련 피고인 가운데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송상진, 우홍선과 학원관련자 여정남 등 8명에 대해서는 대법원이 공소를 기각, 사형이 확정되자 바로 형을 집행했다.

■ 인혁당의 실체

제2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은 끊임없이 진상조사와 재심 요구가 제기되어 오던 끝에 2005년 12월7일, 노무현 정부 당시 설립된 국가정보원의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과거사위)가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침에 따라 조작된 것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이와 함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민보상위)도 2006년 1월23일 제157차 회의에서 제2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 16명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이에 따라 ‘명예’가 회복된 사람은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송상진, 여정남, 정만진, 전대권, 이태환, 장석구, 이창복, 전창일, 강창덕, 나경일, 이재형, 임구호 등이다. 그러나 인혁당이 중앙정보부의 조작이라는 견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증언들이 있다.

▲빨치산 출신의 김세원(金世源)은 1991년 계간지 <역사비평>에서 이복민, 도예종, 우동읍이 1961년 10월 사회당 위원장이었던 최근우의 비밀아지트에 모여 지하조직을 만들기로 합의한 사실이 있다고 밝혔다. 이것은 5‧16군사통치의 장기화가 예견됨에 따라 새로운 정세에 대응할 조직이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며, 김세원은 이 사실을 우동읍에게 들었다고 했다. 김세원에 의하면 이들은 민족자주통일협의회(민자통)의 통일정책심의위원이었던 L교수를 영입하기로 하고, 도예종이 조직을, 이복민(李卜民)이 교양선전을, 우동읍이 총무를, L교수가 대표 겸 재정을 각각 관장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또 사회당의 강령과 규약을 지하조직 수준에 맞도록 약간 수정하고, 서약과 맹세를 함으로써 조직의 형식을 갖추고, 조직의 명칭도 이 때 정해진 것이라 한다. 물증을 남기지 않고 외자(外資, 북한자금)를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학생들과의 접촉으로 이 지하조직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출처: 김세원 증언, 한상구 구성(1994),「4월혁명 이후 전위조직과 통일운동: 사회당-인혁당-남민전」, <역사비평> 15호(1991년 11월호), 141~415페이지)

▲최초의 위장취업 노동운동가로, 1960년부터 1980년까지 좌파 운동권의 전설적 이론가로 알려진 김정강(金正剛)은 인혁당 사건의 주범으로 기소된 도예종과 친밀했던 인물이다. 김정강이 도예종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놓은 것이 실마리가 되어 도예종이 검거됐다. 그는 <자유공론> 1995년 1월호와 1996년 8월호에 실린 회견기사에서 “인혁당은 제1차 사건 때부터 실제로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그가 1차 인혁당 사건으로 투옥된 도예종과 교도소에서 만났을 때 도예종이 그에게 “이번에 검거되기는 했으나 법정투쟁에 의해서 승리적으로 넘어왔고 당은 노출되지 않았으므로 전략적으로 승리라고 봐야 한다”고 말하면서 앞으로 당이 재건되면 입당하라고 권유했다는 것이다. (출처: 정행산(1996), 「인혁당 과연 조작인가」, <자유공론>)

김정강은 그 후 다른 인터뷰에서도 도예종이 형기를 마치고 나가면 전위당(前衛黨: 노동자 계급의 전위대로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을 선도하는 정당)을 다시 추진하자고 자신에게 권유했다고 회상하면서, 당시 피고인들의 검찰에서의 부인(否認)작전이 성공했다는 점도 증언했다. 당시 증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인민혁명당(인혁당)은 당시 법정투쟁에서 성공했습니다. …검사들은 좌파사건들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잘 모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일제히 부인하니까, 처음에는 당황했죠. 나중에는 이 사람들이 엉뚱하게 걸려들었구나 하고 착각을 한 거지요. 그래서 그 때 검찰파동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결국에는 조직으로서가 아니고 고무 찬양 조항으로 유죄가 돼서 (교도소로) 넘어 왔단 말입니다.” (출처: 한국정신문화 연구원 편(2001), 《내가 겪은 민주와 독재》, 선인출판, 90~91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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