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원

林東源

前 통일부장관

  • 비방방송중단이 6.15의 첫 성과

    (2010)

발언록

(이명박 정부가) 화해협력 정책을 집어치우고 대결정책을 써왔기 때문에…

(연평도 포격과 관련) 북한에도 책임이 있지만 우리 정부가 북한에 대해서 과거 정부가 했던 화해협력 정책을 집어치우고 대결정책을 써왔기 때문에, 북한한테 고개 숙이고 들어오라 굴복을 강요하는 정책을 써왔기 때문에 결국은 계속 관계가 악화돼 온 것이다. … 이전 정부부터 해결하지 못했던 NLL(북방한계선)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 …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는 線(선) 개념의 NLL을 面(면) 개념으로, 바다에서도 비무장지대로 바꾸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자는 것으로, 이걸 남북이 합의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진전이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다. 이것을 이 정부 들어와서 부정했기 때문에 서해 바다는 계속 긴장의 바다, 충돌의 바다가 돼 버렸다.

( 2010년 11월 26일 ,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햇볕정책을 안해서 이런(연평도포격) 사태가 나지 않았나

햇볕정책을 안 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나. 햇볕정책을 통해 화해·협력을 추구한 지난 10년 동안에는 도발이 얼마나 감소했나. 물론 김대중 정부 당시인 2002년에는 충돌(서해교전)이 있었다. 한 번에 갑자기 없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긴장이 완화되고 신뢰도 조금씩 키워나가고 이런 현상이 실제로 진행됐었다. 정부만의 노력만으로는 안 됐겠지만 시민참여 공간을 넓혀 줘서 접촉과 교류가 활성화되는 이런 과정을 통해 양쪽 국민들 사이에서 의식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다. 특히 북한 국민들의 (남한에 대한 의식은) 엄청나게 달라졌다. 독일의 통일 과정을 보면 서독이 동독에 20~30여 년 동안 많은 지원을 했다. 화해를 통한 변화라고도 하고 접촉을 통한 변화라고도 하는 이런 정책을 통해서 지원하고 교류하고 민족 공동체 의식을
만들었다.

( 2010년 11월 26일 ,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남북협력기금은 전쟁과 북핵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보험료

최근 대북 지원이 끊기면서 70만톤의 쌀이 남아돌아 연간 창고이용료만 3000억 원이 든다고 해요. 이 쌀을 북한 동포에게 보내는 대신 동물사료로 쓴다고, 북한이 금방 망하고 우리나라가 잘살게 됩니까. 무엇보다 쌀값이 떨어져 당장 농민들에게 그 타격이 돌아가지 않나요. 인도적 차원에서 이념을 떠나 남북교류의 물꼬를 터줘야 해요. 남북협력기금은 전쟁과 북핵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보험료라고 생각합니다. 평화는 공짜가 아니니까요.

( 2010년 08월 17일 ,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정일은) 박식하고 머리회전이 빠른 인물…협상이 가능한 지도자

우리에게 알려진 김정일 위원장은 권력을 상속받은 무능력자, 백성을 먹여살리지 못하면서 공포정치로 탄압하는 비정상적 독재자의 모습입니다. 또 성격이 음울하고 괴팍하며 잔인하고 위험한 인물, ‘기쁨조’에 둘러싸여 밤마다 술판을 즐기는 방탕한 미치광이의 이미지가 형성돼 있죠. 그러나 미국의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등 김 위원장을 직접 만나본 많은 인사들이 받은 인상은 비슷하더군요. 30년간 당에서 요직을 맡아 지도자 수련을 받은 사람답게 정보에 밝고 박식하며 머리회전이 빠른 인물이라는 평입니다. 남의 말을 경청할 줄 알고 대화와 협상이 가능한 지도자라는 평가에 저도 동의합니다.

( 2010년 08월 17일 ,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비방방송중단이 6.15의 첫 성과

6.15공동선언을 채택하고 오찬회가 열렸는데, 이 오찬석상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날 12시부로 전방에서 대남비방 방송을 중지할 것을 명령했다고 공식발표했습니다. 우리 측도 그 이튿날 대북비방 방송을 중지했습니다. 서로 비방방송을 중지한 것이 6.15공동선언의 가시적인 성과였죠. 그 후 양측은 전방에 방송설비 확성기도 모두 철거해버렸죠.

( 2010년 06월 15일 , CBS '이종훈의 뉴스쇼')

한반도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길, 6.15 선언에 있다

6.15 공동선언을 합의하면서 우리가 그리고 있던 그림, 미래상은 남북이 서로 인정하고 화해·협력하면서 오고가고 돕고 나누면서 '사실상의 통일 상황'을 실현하는 길을 닦는 것이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길을 닦고 다음부터는 길이 열리길 바랐다…우리도 법적인 완전 통일은 상당한 시간이 걸리지만 사실상의 통일 상황은 마련할 수 있지 않겠나 싶었다. 그를 위해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이 이뤄져야 하는데 첫째, 평화와 통일의 과정을 공동으로 관리·추진할 기구가 필요하다. 그게 '남북연합'이다. 둘째, 경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유럽국가들이 경제공동체를 통해 국가연합을 거쳐 통일국가를 지향하는 것처럼 경제적 접근을 해야 한다. 그 시범 사업이 바로 개성공단이다. 셋째, 군비통제를 해야 한다. 남북 경제공동체 건설과 군축을 포함한 군비통제를 병행하면 서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고 본다. 서로 영향을 주면서 맞물려서 나간다. 넷째, 더 나아가서는 정전협정을 폐기하고 '통일지향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그건 남북연합에 기초해서 해야 하는 것이다.

( 2010년 06월 15일 , '6.15 공동선언 10주년 연속 인터뷰')

(김정일은) 식견이 있고 두뇌가 명석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며 말하기를 즐기는 타입입니다. 식견이 있고 두뇌가 명석하며 판단력이 빨랐습니다. 명랑하고 유머감각이 풍부한 스타일입니다. … 좋은 대화 상대자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연장자를 깍듯이 예우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2000년 06월 01일 , 남북정상회담 직전 김정일을 면담하고 온 뒤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고하면서. 임동원 회고록 <피스메이커>)

(비전향장기수 송환 시) 냉전수구세력의 송환반대가 극심했다

8·15 이산가족 교환방문 후 9월 초 우리 정부는 화해의 상징으로, 북한에 돌아가기를 원하는 非전향장기수 63명 전원을 판문점을 통해 무조건 송환했다. 분단피해자들의 인권을 존중하겠다는 우리 정부의 성숙한 자세를 과시한 것이다. 당연히 냉전수구세력의 송환반대와 방해가 극심했는데, 이들은 ‘가치관의 혼란 우려’, ‘북측의 체제 선전에 이용당할 우려’ 등을 들먹이며 ‘탈북자 및 국군포로 문제와 연계시켜야 한다’는 논리로 송환 반대 여론을 조성했다. 7년 전 이인모 노인을 비롯한 비전향장기수 송환을 반대할 때 들고나온 논리를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 1111년 11월 11일 , 임동원 회고록 <피스메이커> P.474)

(미국) 네오콘들의 방해책동에 맞서 평화회랑 건설에 매진

부시 대통령은 북을 ‘악의 축’이요 ‘선제 核공격’의 대상이라며 위협하고, 핵의혹을 조작해 제네바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미국은 국제기구까지 동원해 북측을 압박하고, 쌍무회담을 기피하며 북한이 핵문제의 국제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런 워싱턴의 네오콘들의 방해책동에 맞서 우리 민족은 힘을 합쳐 지뢰를 제거하고‘평화회랑’건설을 위해 매진했던 일을 이제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 1111년 11월 11일 , 임동원 회고록 <피스메이커> P.517)

인물정보

출생

  • 평북 위원 (1934)

학력

  • 인제대 정치학 명예박사 (2002)
  • 서울대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1964)
  • 서울대 철학과 졸업 (1961)
  • 육군사관학교 졸업 (1957)
  • 평북선천신성고 졸업 (1950)

주요 경력

  • 불법감청 등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구속 (2005)
  • 세종재단 이사장 (2004)
  • 대통령 외교안보통일특별보좌역 (2001~2003)
  • 제27대 통일부 장관 (2001)
  • 제25대 통일부 장관 (1999~2001)
  • 제24대 국가정보원 원장 (1999~2001)
  • 정부개편위원회 심의위 위원 (1998)
  •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수석비서관 (1998)
  •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장 (1998)
  • 김대중 아태평화재단 사무총장 (1995)
  •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 (1994)
  • 통일부 차관 (1992)
  • 남북교류협력분과위원회 위원장 (1992)
  • 남북고위급회담 대표 (1990)
  • 외교안보연구원 원장 (1988~1992)
  • 육군 소장 예편 (1980)
  • 육사 전임강사, 조교수 (1964~1969)